병원을 출발한 버스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옆에 앉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며 말씀하신다. 내가 육이오 사변때 형대신 군대를 갔다아이가. 형이 영장이 나왔는데 형은 형수도 있고 해서 죽으면 안될꺼 같은기라. 그래서 내가 대신 군대를 갔는데, 같이 간 사람 팔십명 중에 다죽어삐리고 내혼자만 살아남았다 아이가. 근데 니 아버지가 내 국가유공자 시켜준다고 이래저래 띠댕기고 차타고 내하고 같이 우리 고향 밀양에까지 왔다갔다하고 그랬다. 그거 형이름 내이름으로 바꿔준다고. 니 아버지가 그랬다. 니 아버지는 약한 사람을 자꾸자꾸 도울라 그랬어.
이제 과거형으로 밖에 이야기를 못하겠다. 경북 구미 선산군 널뫼 촌구석에서 7남매 중 세번째 아들로 태어나서 맏형 대학 공부시키신 덕택에 땡전 한푼 없이 시작한 젊은 시절부터 욕심하나 없이 남에게 해될 만한 일 안하려고 조심조심 살아오신 분이었다. 실내장식이다, 수타면 뽑기다, 교통 순시원이다 전전하다 소방 공무원 시험 합격하여 평생 남 돕는 일만 하셨다. 웬만하면 따기도 힘들다는 츄레라 운전 면허가 있다고, 그 면허가 왜 그렇게 따기 어려운지 젓가락 두 짝을 연결해서 설명하시면서 자랑하시곤 하셨던 분이다. 당번과 비번을 이틀 주기로 번갈아가며 근무하고, 남들 쉬는 명절에는 언제나 비상근무를 하셨다. 불만 나면 사다리차를 끌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사람들 구한다고 제대로 잠도 못 주무셨으리라. 그래서 그랬을까. 중년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쓰려지셨고, 의사가 말해 주는 기대 수명에 실망하시어 비오는 날 낚시대만 챙겨들고 집을 훌쩍 떠났다가 누나의 간곡한 권고로 한참 뒤에야 집에 들어 오셨다. 다시 재기하여 일하시기 수년 뒤 두번째 심장발작이 왔고 그래도 다시 일어서서 일터로 돌아가셨다.
머리 속에는 오직 가족과 친구 뿐이셨다. 돈 벌어다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셨기에 본인 위해서는 돈 한번 쓰실 줄 모르셨다. 그저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소박한 밥상을 최고의 식단으로 여기셨기에 식당 가서 외식해 본 기억도 몇 번 없다. 한 번 산 물건은 구제불능 반파상태는 되어야 쓰레기통으로 향했고, 아직도 '도란스' 꽂아야 작동하는 백볼트 드라이기까지 집에 남아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가끔씩 자식들 용돈 쥐어 주는 것에서 쏠쏠한 재미를 찾으셨다. 큰아들이 아들 세대 중 처음으로 대학 들어갔다고 엄청 좋아하셨고, 둘째 아들 서울대 들어갔다고 엄청 좋아하셨다. 그래봤자 아버지 호위호식시켜 드리지도 못하는 별 볼일 없는 아들이구만 그래도 어딜 가든 아들 자랑 뿐이셨다. 아들이 아버지 양복 한벌 사드리겠다고 백화점 모시고 가도 어울리니 안 어울리니 보다는 가격표에 더 관심이 많으셨고, 좀만 비싼 옷은 안 어울린다고 퇴짜를 놓으시고, 저렴한 옷은 마음에 든다고 말씀하셨다. 그걸 다 아는 어머니와 아들도 그분 스타일이니 어쩌랴. 캐나다 사는 큰 아들 전화번호, 둘째 아들 블로그 주소 같은 거는 큼지막하게 쓰셔서 지갑에 넣고 다니셨다. 집에서는 정리정돈과 청소와 설거지를 마다하지 않는 가정적인 아버지였다. 종교심 많은 어머니에겐 결국에 설득되어 동료 신자의 반열에 들어서기까지 하셨으니 가족 사랑은 정말 대단하셨다. 공무원 연금과 국가 유공자 자격을 얻고 나신 후에는 내가 평생 먹을 건 다 벌어놨다며 아들에게 보여 주시곤 하셨다.
남자 인생 퇴직 후에 가장 위기라고. 평생 다닌 직장 떠나신 후 소일거리 찾은신 것은 역시 그 동안 소박하게 꿈꾸어 오던 텃밭 가꾸기였다. 퇴직금으로 고향 가까운 곳 산 허리에 조그마한 텃밭 하나 장만하시고는 흙집 짓는 아마츄어 건축사, 고추 심는 아마츄어 농사꾼 기질을 발휘하셨다. 굵게 자라지도 않는 더덕, 이파리도 조그만한 배추, 잘아 빠진 상추. 그런 것들을 보시고도 신기해 하시고 즐기시고 하셨다. 시간 있을 때마다 친척들, 친구들, 지인들 흙집으로 초대해, 아궁이에 삼겹살 구워 대접하고, 솥단지에 백숙 만들어 대접하시곤 했다. 구청에서 무료로 해주는 컴퓨터 강좌에 다니시더니, 인터넷에 워드에 엑셀까지 다 배우시고, 고향 친구 우정회, 입사 동기회 총무까지 도맡아서 일하셨다. 아들 일하는데 방해될까봐 일분삼십초 이내로 전화하셔서 '한자변환'이나 '까페 메뉴 설정'등을 물어 보시곤 하셨다. 컴퓨터 잘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이것저것 출력하여 갖다주며 실력 발휘를 해 보이셨다. 퇴직금으로 마련한 까만색 중형차를 이십톤짜리 소방서 사다리차 몰듯이 운전하시면서 언제나 아들에게는 조심 운전, 조심 주차를 강조하셨다. 주방 옆에는 '행복한 우리 가정 알고보니 불조심' 뭐 그런 류의 표어도 붙여 놓으시고, 차에도 집에도 소화기를 비치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아들 내외 결혼할 때 그렇게 좋아하시면서도 며느리한테 말도 잘 못거는 그런 분이셨다. 아들 며느리와 네명이 윷놀이를 하고 고스톱을 칠 때에도 연신 '한방 브루스'를 외치시면서도, 속으로는 안전빵만 찾으시던 그런 분이셨다.
그런 분이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 가셨다. 화재 안전과 사고 방지를 평생 업으로 하시던 분이 안전 사고로 '한방'에 가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가족에게 친구에게 슬픔을 안겨주시고는 이제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 고향 가까운 곳에 아무말 없이 누워 계시리라. '때와 예기치 않은 일'이란 생기기 마련이고, 먼저 경주를 시작한 사람이 꼭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알고 있다. 이제 어찌하리요. 누군가 아버지를 부르면 그 때야 그 목소리를 듣고 나오시리라. 그러면 다시 만나게 되리라. 다시 고향 땅에 씨뿌리고 땀흘리며 가족과 친구를 위해 나누어 주실 분. 그런 아버지를 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도 그런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2009년 2월 12일 씀.
'닥터의 사사로운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리고 -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 14, 15번 -에더 사중주단 (6) | 2023.01.20 |
---|---|
내 얘기 들어 보게, 자네 - 키스 자렛 - The Melody at Night, With You (0) | 2023.01.19 |
"불장난의 추억" - 잡지 투고 글 (0) | 2023.01.19 |
말 잘 하기 (0) | 2023.01.16 |
김연신,「차가 막힌다고 함은」 (0) | 2023.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