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기 들어 보게, 자네.
트집 잡을려고 마음 먹으면 한도 끝도 없지 않겠나. 내가 자네가 처음 늘어 놓던 불평을 아직도 기억한다네. 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귓가를 맴도는 따스한 멜로디가 어디 현대 재즈의 최고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에게 어울리기나 하겠냐고. 뭐라고? ECM이라고? 에디션 오브 컨템퍼러리 뮤직이라고? 작곡된지 최소 50년은 된 듯한 곡들로, 그것도 재즈 좀 듣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유명한 곡들을 모아 놓고 ECM레이블에 발표했다니. 이건 완전 배신이다, 배신이라고. 천부당 만부당이라고. 초점도 안 맞는 자켓 사진 흑백으로 찍어다 놓고, 런타임 딸랑 오십오분 십팔초로, 비싸빠진 ECM 음반을 내놓고는, 자신의 만성피로증후근 탈피 기념 몸풀기 음반이라고 선전하는 키스 자렛은 과연 양심이 있기나 한 것이냐고. 솔로 연주의 그 무한한 상상력과 임프라바이제이션은 차치하고서라도, 트리오에서 보여주는 그 치열한 앙상블과 날카롭고 신선한 재해석은 다 어디로 출장보냈냐고. 연인들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속삭이고 있을 커피숍에서 틀 음악이면 이 돈 주고 열 두 장도 더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벗이여. 그렇게만 보지 마라. 이 음반 돌려 놓고, 헤드폰 끼고 앉아서 마음이 짠해지지 않은 적이 어디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아니 마음이 짠한 날이면 고양이 생선가게 쳐다보듯 씨디 진열장 두리번거리면서 이 흑백톤의 음반에 손을 뻗지 않았던가. 그 때 기억나나, 자네? 저녁 7시쯤 나와 함께 달리던 차 안에서, 라디오 프로에서 이 음반 첫 곡이 흘러 나오는 것을 듣고 집으로 달려와 몇번 이고 다시 듣지 않았던가. 그래, 그 글렌 굴드만큼이나 알 수 없는 그 한숨 섞인 신음 소리도... 봄비 촉촉히 내리는 날이면, 오래 전 그 친구가 문득 생각날 때면, 노을이 유난히도 아름답던 저녁이면, 소주 은근히 알딸딸한 밤이면, 그리고 조용히 눈 내려 온 세상 하얗게 덮혀 가던 밤이면, 키스 자렛 피아노 소리에, 그 터치에, 그 멜로디에 눈물 훔치지 않았던가. 그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벗이여. 그렇다네. 내가 그대에게 이 씨디 한장 선물한 거. 내가 제일 잘한 일 중에 하나일세.
2006년 4월 2일 씀
'닥터의 사사로운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3 시절 내 추억의 음반: 윈튼 마살리스 - 스탠다드 타임 3권 (0) | 2023.01.20 |
---|---|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리고 -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 14, 15번 -에더 사중주단 (6) | 2023.01.20 |
"불장난의 추억" - 잡지 투고 글 (0) | 2023.01.19 |
아버지 (0) | 2023.01.16 |
말 잘 하기 (0) | 2023.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