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yes24.com>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에는 아주 멋진 '고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내가 처음 구입한 클래식 음반들 중에 하나가 알프레드 브렌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유명곡 음반이었는데, 거기에는 '월광' '비창' '열정' '고별' 네 곡이 들어 있었다. 앞에 세 곡에 비해 유명세가 다소 떨어지기는 하나 '고별' 소나타는 (베토벤은 이 곡에다 '고별, 부재, 귀환'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 이름이 너무나 낭만적인데다 'Les Adieux'라고 불어로 멋지게 이름이 붙어 있어서 좋아하게된 곡이 었다. 그런데 곡을 들어보면서 곡이 별루 절절하거나 눈물짓게 만드는 것이 아닌 것 같아 속으로 스스로 메말라가는 내 감수성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고, 투쟁과 승리밖에 모르는 '악성'의 감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로맨틱한 이름에 매료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마르크스Adolf Bernhard Marx라는 사람은 "이 작품이 사랑하는 연인과의 생애의 순간들임을 사람들은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작품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렌츠Wihelm von Lenz라는 사람은 이 소나타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연인들은 새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듯 그렇게 자신들의 팔을 벌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멋진 표제를 통해서 이 곡이 인류 보편의 주제인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을 표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인 것 같다. 어처구니없게도, 베토벤은 자신의 자필 악보 위에 "1809년 5월 4일 루돌프 대공이 그의 영지를 떠날 때의 작별"이라고 썼고, 두 번째 부분의 제목으로는 "1810년 1월 30일 루돌프 대공의 도착"이라고 썼다. 대략 출장 기념곡이 아닌가! 한슬리크는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베토벤이 [이 곡을 쓸 때] 대공이 아니라 행복한 기쁨에 넘쳐 날갯짓하듯 달콤하게 애무하고 있는 연인을 상상했어야 했다면, 그는[베토벤은] 이 사실에 얼마나 항의하겠는가!"
정말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많은 예술 비평에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가장 추상적이며, 개념적이 아닌 음 예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슬리크의 말대로 "다른 모든 예술에서는 설명에 해당되는 것도 음 예술에서는 이미 은유가 된다." 이것이 어쩌면 음반리뷰나 음악 평론이 안고 있는 내재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 작곡가가 작곡할 때의 상황을 파헤치거나 그 시대 상황을 본다든지 아니면 표제 같은 것을 뒤적인다. 하지만 한슬리크는 음악은 음 그 자체로만 감상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당신 팽배해있단 '감정 미학'에 반대하면서 음악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음악의 목적이나 내용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음악적 형식이 곧 정신의 표현이며 음악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다소 받아들이기 어색한 '음악의 형식=음악의 내용'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한슬리크의 주장은 설득력있다. 성악 음악보다 기악 음악이 음 예술의 순수성에 더 부합하다고 믿으며, 감상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오페라나 뮤지컬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슈베르트 가곡보다는 바흐의 파르티타를 좋아하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극장 가서 '오페라의 유령'이나 '물랑 루즈'를 보게될 경우, 영화 중간이 다 되어가도록 '도대체 영화가 언제 시작하는거야?'하고 식식거리는 사람. 특히 오페라에서 테너 가수와 소프라노가 극을 진행하면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밥 먹었소?''네, 먹었어요.'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반은 말이고 반은 노래인, 레치타티보를 들으면 도저히 어색함을 참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치는 사람. (즉 나 같은 사람.)
오랜만에 머리 아프지만 재미있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연필 손에 들고 밑줄 그어가면서 주석까지 세밀히 읽어 보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 책은 본문보다 주석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더군다나 내 나름대로의 주석까지 달아가면서. 옮긴이 이미경의 사려 깊으면서도 세심하고 정확한 번역(물론 독일어는 잘 모른다마는...)이 유려하면서도 가끔씩 위트넘치는 미학자의 저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머리 싸메고 한번쯤 읽어 봐야할 책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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