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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의 사사로운 글쓰기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리고 -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 14, 15번 -에더 사중주단

by DoctorChoi 2023. 1. 20.
이미지 출처: yest24.com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리고

고전음악에 조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 악장으로 된 악곡들의 기본 구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크 협주곡처럼 3악장을 기본으로 하면 빠르고-느리고-빠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4악장을 기본으로 할 때는 주로 3악장이 짧은 경우가 많으며, 역시 빠른1악장-느린2악장-빠른3악장-빠른4악장으로 되어 있다. 신나게 시작했다가 천천히 서정성을 음미하다 통쾌하게 끝나는게 기본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의 음악적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방식이 효과적이었기에 오랜 기간동안 이런 구성이 사용되어 왔지만 현대 음악에서는 이것도 저것도 없는 경우가 많다. 베토벤이 유명한 '월광 소나타'에서 서정적이고 느린 악장을 맨 앞에 배치한 것처럼 빠르고 느린 것의 순서를 임의로 하는 경우는 물론, 여기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처럼 6개 악장이 모조리 아다지오인 경우도 있다. 아참, 5악장과 6악장은 다르다. 'Adagio molto 매우 느리게' @_@

 

빠르기 말이 다 똑같이 아다지오여서 그럴까. 쇼스타코비치는 각 악장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 놓았다. 1악장 엘레지(悲歌), 2악장 세레나데, 3악장 인터메쪼(간주), 4악장 녹턴, 5악장 장송행진곡, 6악장 에필로그. 세레나데 빼놓곤 모두가 우울하거나 억제된 분위기의 이름들인데 이 곡에서 세레나데 마저도 작곡가 특유의 분위기대로 침울하고 어두컴컴하다. ('세상에 나보다 우울한 사람은 없을꺼야!'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곡을 들어보면 위안을 얻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오랜 친분이 있었던 베토벤 사중주단의 멤버를 비롯한 친구들을 하나 둘 잃어가고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시점에서 작곡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 같다. 어찌보면 '유로지비'(러시아어에만 있는 말, 광대 아니면 백치)로 살았던 그의 삶은 무척이나 불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스탈린의 탄압에 반항하기도 하고 순종하는 척도 했으며, 스탈린도 서방 세계까지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진 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현악 사중주 15번에는 자신의 '유로지비'로서의 삶에 대한 회고내지 회한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귀 기울여 들어보면, 현대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독특한 소리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현을 가야금 뜯듯이 잡아 뜯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이 소리는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악장에서는 ppp(아주아주 여리게)에서 sffff(엄청아주아주아주 세게)로 갑작스럽게 변하는 크레센도들이 연달아 있는데, 마치 고속도로 한가운데 서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차량들이 쌔~~엥 하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가 귓가를 할퀴고 뒤로 사라져 가는 상상을 하게 한다. 도플러 효과의 현 위에서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론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사중주 8번을 무척 좋아하는데, 14, 15번도 매우 뛰어난 곡인 것 같다. 예전에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단의 연주로 현악 사중주 8번과 피아노 오중주를 공연에서 본 기억도 있다. 언제부터 쇼스타코비치처럼 쉽지 않은 곡들을 듣기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프로코피예프, 바르톡 등도 용기를 내어 들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용기를 내기 어렵다면 낙소스의 염가반에 조심스레 도전해 보기를 권한다.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 전곡을 녹음한 에더 사중주단의 연주는 호평을 받고 있다.

 

2005년 3월 7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