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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위한 읽기 - 책 리뷰

월터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by DoctorChoi 2023. 1. 20.

이미지 출처: yes24.com

 

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장인 시편 119편은 이합체시(離合體詩, acrostic)라 불린다.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악사들이 긴 시들을 낭송해야 했을 때, 이합체의 형식은 기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만군의 여호와'와 같이 어떤 상용구 혹은 정형구들은 성경 전체에서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문자문화에 남아 있는 구술문화의 흔적들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 장르인 판소리처럼 몇시간에 걸쳐서 긴 내용을 기억해야만 완창할 수 있는 작품들은 구전되어 전해지는 것들로서 문자보다는 말로 전달되는 구술문화의 독특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월터 옹의 이 위대한 언어학의 역작은 흥미진진한 연구와 인간 언어와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우리 시대에 구술문화 특히 쓰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1차적인 구술성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텍스트도 그러하고 우리의 판소리도 그러하고 위대한 웅변가들의 수사학도 문자보다는 구술이 지배적인 시대의 유산들이다. 소리를 공간에 잡아두려는 시도라 할 수 있는 쓰기, 더 나아가 인쇄라는 활동은 음파의 진동으로 전달되고 공동체의 기억에만 그 원형이 남아 있는 구술문화와는 다른 역동적이고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인간의 사고, 정신 역학까지 관련되어 큰 차이를 나타내며, 그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고대의 구술문화 그리고 아직 쓰기를 사용하지 않는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줄 뿐만 아니라 문자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구술문화의 특징을 이용하여 오히려 새로운 방식의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월터 옹이 정리한,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의 특징들은 다음 아홉가지다.

 

1) 종속적이라기보다는 첨가적이다

2)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이다

3)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다

4)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다

5)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된다

6) 논쟁적인 어조가 강하다

7) 객관적 거리 유지보다는 감정이입적 혹은 참여적이다

8) 항상성이 있다

9)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상황의존적이다

 

책을 읽어 보면 이 하나하나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설명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문자 사용자로서 문자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구술문화의 독특한 점을 부각시키면서 그 차이를 흥미롭게 설명하는 존중심 있는 서술이 무척 마음에 든다. 월터 옹의 통찰은 더 나아가 현대 전자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까지 설렵하고 있으며, 세계 문화의 줄기 속에서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를 바라보게 해준다.

 

구술문화가 아직도 여러 문화 전반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발견이다. '더즌즈dozens'라고 불리는, 상대방 어머니에 대해 상스러운 농담을 하는, 미국이나 카리브해 여러 나라 흑인들의 게임도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텔레비젼에서 종종 보게 되는 랩 배틀도 비슷한 종류이다. 흑히 '디펜스'라고 부르는 박사학위논문심사도 구술문화의 흔적이다. 명백히 문자로 남게 되는 박사학위논문이지만, 이미 박사인 사람들을 모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진통을 겪게 하는 이러한 제도도 구술문화 특유의 역동성을 이용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대통령 후보 텔레비젼 토론, 시사토론 프로그램 등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아이들이 줄줄 노래할 수 있는 이유 또한 구술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뛰어난 학자의 역작은 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찬찬히 읽어볼 만하다. 방대한 지식을 저술로 집야하는 방식, 구술문화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접근하고 분석한 방식 역시 흥미롭다. 우리 한국인 독자에게는 143면에 나오는 저자의 '한글'에 대한 칭송-'알파벳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은 한국에서 제시되었다-또한 주의를 끈다.

 

2009년 3월 23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