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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위한 읽기 - 책 리뷰

햄릿 (완역본) -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 김재남 번역

by DoctorChoi 2023. 2. 15.

이미지 출처: yes24.com

이렇게 번역하느냐 저렇게 번역하느냐 - 그것이 문제로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한 가지 게임을 인용한 것이 나온다. 몇 사람이 모여서 이 멍청한 게임을 하는데, 자신이 읽지 않은 책 을 하나 고백했을 때,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을 때, 승자가 되는 것이다. 자폭하여 승리를 얻는 이 게임에서 한 영문학 교수가 당당히 '햄릿'을 읽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서 승리를 거머쥔다는 이야기다.

 

<햄릿>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한 개의 <햄릿>에 여러가지 <햄릿>이 입수가능한 서적 시장에서 결국 좋은 <햄릿>을 읽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번역의 문제이다. '완역본'이라고 표지 왼쪽 위 'William Shakespear' 밑에 써 놓은 것은 진짜 <햄릿>을 우리말로 읽고 싶으면, 이 책을 택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허나, <햄릿>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책이 잘 있을까. 그 높디높은 인지도는 물론이요, 우리로치면 훈민정음 시절에 해당할, 16-17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오래된 잉글리쉬요, 거기다 새로운 어휘도 다량 생산해 내며 글을 썼던 천재가 운율 신경써서 쓴 운문체의 희곡인데다, 정신병, 근친 결혼, 자살, 독살, 결투, 음모에 우유부단까지 등장하는 복잡한 내용이니. 이 어려워빠진 작품의 생생한 감동을 21세기에 사는 한국인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을 것이고, 그나만 유일하게 위안이 될만한 것은 작품 길이가 짧다는 것-"여자의 사랑처럼."

 

전 셰익스피어학회 회장 김재남 번역과의 비교를 위해 역시 완역판인 <셰익스피어 4대비극>(셰익스피어 연구회, 아름다운 날, 2005)를 골랐다. '셰익스피어학회'와 '셰익스피어 연구회'가 같은 단체인지, 다른 단체인지, 다르다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역판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원문과 비교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편의상 '학회판'과 '연구회판'으로 구분하겠다.

 

  • 3막 1장 98번째 줄, 오필리어가 기도를 마치고 난 후 햄릿과 오필리어의 인사 장면,

(원문)

OPHELIA:

Good my lord,

How does your honour for this many a day?

HAMLET:

I humbly thank you; well, well, well.

 

(학회판)

왕자님,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황송하오, 태평, 태평, 무사태평합니다.

 

(연구회판)

햄릿 왕자님,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소.

 

연구회판은 역사극에서 나올법한 아주 지극히 정상적인 대화이지만, 학회판은 약한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햄릿의 말투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왕자가 'humbly'라고 말하고, 'well'을 세번이나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는 느낌이 학회판에 훨씬 더 잘 드러나 있다. 연구회판은 본문에는 없는 이름을 넣어 '햄릿 왕자님'이라고 했는데, 이는 역시 큰 느낌의 차이를 가져온다.

 

  • 3막 1장, 그 유명한 햄릿의 독백을 보자.

(원문)

HAMLET: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65)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To die, to sleep—

 

(학회판)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 장한 것이냐, 아니면 환난의 조수를 두 손으로 막아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장한 것이냐? 죽는다, 잠 잔다 - 다만 그 뿐이다.

 

(연구회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죽는 건 그저 잠자는 것일 뿐.

 

사느냐가 먼저냐, 죽느냐가 먼저냐, 이것이 문제다. 원문에는 물론 사느냐가 먼저다. 죽느냐가 먼저 나오면, 죽음을 무릅쓰느냐 말 것이냐의 의미에 가까워진다. 사느냐가 먼저 나오면, 지금 이미 살아 있으므로, 앞으로의 결행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고려해 보면, 약간 뜬금 없는 표현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원문의 순서를 바꾸느냐는 번역자의 고민일터. 직역을 한다면, '살것이냐, 안살것이냐' 이렇게 해야 할텐데, 물론 아무도 그렇게 번역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회판이 끝부분의 'To die, to sleep'을 '죽는다, 잠잔다- 다만 그 뿐이다.'로 번역한 것은 'To be, or not to be'를 '죽느냐 사느냐'로 번역한 것에 대응하는 운율감을 살려 준 것이다. 연구회판이 '죽는 건 그저 잠자는 것일 뿐'이라고 한 것은 다소 밋밋하다. 두번째 문장에서 볼 수 있는 학회판의 한가지 특징은 '명사의 선호'인데, 다른 동사나 형용사로 대체할 수 있는 단어들도 될 수 있으면 환난, 조수, 근절 등의 약간은 어려운 명사로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p.43 세상은 사개가 제대로 맞지 않고 있어.

p.61 참, 사바의 공기를 면하려면 그곳밖에.

p.118 이성이 사음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판이니.... 사음에 넋이 빠져 돼지들처럼 정담을 교환하는 것이 고작이죠.

p.140 미투리, 파립

 

개인적으로 상당히 재미있었던 부분을 한 번 보겠다.

 

  • 5막 2장, 오즈리크가 햄릿에게 와서 레이터스를 칭찬하며 결투를 부추길 때,

(원문)

HAMLET:

I beseech you remember—

[Hamlet moves him to put on his hat.]

OSRIC:

Nay, good my lord; for mine ease, in good faith. Sir,

here is newly come to court Laertes; believe me, an

absolute gentleman, full of most excellent differences, of

very soft society and great showing. Indeed, to speak

feelingly of him, he is the card or calendar of gentry;

for you shall find in him the continent of what part a gentleman would see.

 

(학회판)

햄릿: (모자를 쓰라고 손짓하면서) 제발 모자를...

오즈리크: 아니, 괜찮습니다. 제게는 이게 편합니다.

그런데 실은 이번에 레어티스가 귀국했는데- 참 완전무결한 신사랄까, 뛰어난 점을 두루 겸비하고,

대인관계도 지극히 원만할 뿐더러, 풍채도 훌륭합니다. 다소 지나친 것 같지만 감히 평한다면, 그분이야말로 신사도의 도표이자 지침서라고 할 수 있지요. 하여튼 신사라면 누구나 지니고 싶을 만한 미덕은 모두 그분 안에 집결해 있습니다.

 

(연구회판)

햄릿: 잊지 말라니까. (모자를 쓰라고 손짓한다)

오즈릭: 왕자님, 제 편의를 봐주시지요. 그 분은 빈틈 없는 신사이며, 뛰어난 기예 솜씨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풍채도 당당해 신사도의 표본이요, 지침서라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신사로서 갖추어야 할 품격을 모두 갖추고 있지요. 레어티스 님이 귀국하셨습니다.

 

"I beseech you remember"를 그대로 '잊지 말라니까"로 번역하면 분위기 파악에 도움이 안 된다. 계속 오즈리크의 거슬리는 모자를 가지고 딴지를 걸고 있는 햄릿의 마음 속이 드러나지 않는다. 레이터스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서, 슬쩍 'here is newly come to court Laerte'라고 말을 시작하는데, 연구회판은 그말을 오즈리크의 말 맨 뒤에 갇다 놓음으로써, 뜬금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여기서도 역시 학회판의 명사 선호가 드러나는데, 완전무결, 겸비, 도표, 집결 같은 명사들이 그러하다. 가끔씩 부담스럽다.

 

또한, 전반적으로 학회판은 연구회판보다 구어체를 좀더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 1막1장, 버나도와 프란시스코의 첫 대화:

(원문)

BERNARDO:

Who's there?

FRANCISCO:

Nay, answer me. Stand and unfold yourself.

 

(학회판)

게 누구냐/넌, 누구냐? 섯! 이름을 대라.

 

(연구회판)

거기 누구냐?/너야말로 누구냐? 거기 서서 신분을 밝혀라.

 

물론 나는 영문학도도 아니고, 셰익스피어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지만, 한국어 사용자로서 양질의 번역으로 외국 고전을 즐길 권리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런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면서, 좋은 번역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고 본다. <햄릿>의 경우에는 연구회판보다 학회판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고전적인 문제를 초월하여, 좋은 고전이면 좋은 고전일수록 더 많은 번역판이 나와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기를 내심 기대해본다.

 

<햄릿>의 원문 출처:

http://www.enotes.com/hamlet-text

 

2009년 6월 16일 씀